2015년 12월 20일 일요일

이란성 쌍둥이 근친 썰

나는 나와 4분차이의 이란성 쌍둥이 여동생이 있다

우리 친 할머니 께서는 이란성 쌍둥이라는 사실을 아시자 

남여 쌍둥이는 커서 서로 붙어 먹는다며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를 지우라고 주장하셨고 

그 일로 인해 아버지와 의절하셨다 

우린 할머니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근친상간을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우리집은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그닥 평범하진 않았다 

우리 아버지는 소위 말하는 건달이였으며 우리 어머니는 밤무대 트로트 가수 셨다 

어렴풋하게 우리집에 일도 안하는 삼촌들이 살았던 시기가 있는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사람들이 나이먹은 분들은 다들 알만한 꾀 큰 사건을 저지른 수배범이였다거나 

어머니와 우리가 탄 차가 열댓명의 괴한 들에게 납치 당할뻔 했으나 빨리 달려와준 경찰 덕에 목숨을 건진일이나 

꾀나 다이나믹한 유년기 였다 그래도 내 인생은 아직 까진 평온한 편이였다 

나와 내동생의 인생이 꼬이게 된 결정적 사건은 초등학교 당시 국민학교 2학년 쯤 때 벌어졌다 

간단하게 말하면 어머니는 남자가 있었고 아버지는 여자가 있었다 

아버지의 여자가 임신을 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인 돈을 잔뜩 빼았아 이혼했다 

이혼 과정에서 나는 아들이므로 아버지와 살게 되었고 동생은 어머니와 살게 되었다 

쌍둥이들이 대부분 그럴꺼라고 생각하는데 서로에 대한 애착이 다른 형제 들에 비해 좀 강한 편이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떨어져 살아서 인지 나도 내동생도 상당히 서로를 그리워해 

매일 밤 서로 전화를 하며 서로를 그리워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건 전화를 어머니가 받고는 같이 살지 않으니 더 이상 전화하지말라고 소리치고는 끊었다. 

나는 몇번인가 더 전화했지만 그때마다 엄마의 짜증섞인 욕설만 들려올 뿐이였다 

침울해 있는 나를 인자한 새엄마는 어머니도 보고싶고 동생과나를 만나게 하고 싶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 하는 시기 라는 식으로 나를 설득했고 그렇게 동생과 나는 멀어 졌다 

동생과 헤어져 산지 3년 어느새 새엄마나 새로 태어난 남동생과의 생활도 적응 되었고 

여동생이 내인생에서 서서히 잊혀질때 쯤 이였다 

내가 살면서 딱 기억나는 뉴스가 세가지인데 

하나는 라이브로 지켜본 9.11 테러 사건 뉴스였고 두번째는 노무현 대통령 서거 뉴스였고 

세번째는 이날본 씨랜드 화재 사건 의 뒷수습에 관한 뉴스였다

새어머니는 동네 학원의 미술교사 출신으로 (아버지와의 불륜이 발각되면서 짤렸지만)

교육에 꾀나 민간한 분이셨고 저녁시간엔 항상 뉴스를 틀어놓고는 하셨다 

아주 오래간만에 아버지도 함께한 저녁시간에 씨랜드 화제사건에 관해 뉴스앵커가 발표하고 

아버지가 거기에 호응하며 혀를끌끌 차던 그때에 우리집 초인종이 울렸고 

새어머니가 누군지 궁금해 하며 현관으로 향했고 나머지 세사람이 전부 다시 티비에 집중했을때 

현관에서 새어머니의 비명같은 소리가 들렸가 아버지와 나는 깜짝놀라 

현관으로 달려갔고 우리가 마주 한건 내 기억속에 잊혀져 있던 내 쌍둥이 여동생 이였다 

3년만에 만난 동생의 몰골은 끔찍했다 

온몸엔 멍자국이였고 머리털은 듬성듬성 빠져있었으며 친엄마의 집에서 맨발로 이곳까지 온듯

발은 온통 피 투성이였다 

나중에 아버지가 술에취해 울며 내동생을 부여잡고 울때 들은 이야기지만 어금니 세게가 빠져있었다고 했다 

내동생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 모든 상황을 이해한 아버지는 골프채를 겨눠잡고 귀신같은 얼굴로 

뛰쳐 나가려고 했으나 새어머니는 일단 병원이 먼저라며 여동생을 들고는 병원으로 향했다 

어린나이였지만 대충의 상황을 파악한 나는 동생과 떨어져 즐겁게 지낸 지난 3년이 몸서리치게 
죄스럽게 느껴졌다 

친어머니와 친어머니의 남편은 아버지에게 뜯어낸 위자료로 큰 술집을 차렸고 

처음엔 꾀 잘나갔지만 경기가 어려워지며 상당히 궁지에 몰렸다고 했다 

사업이 잘 되지 않자 어머니와 그남자의 화살은 내 여동생에게 돌아왔고 꾀오랜기간 심각한 가정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다 

여동생은 이때의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고 나도 절대 물어보지 않지만

술에 취해 조금 이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틀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너무 배고파 

책을 뜯어 먹은적도 있다고 하는데 동생을 부여잡고 3시간은 운거 같다 

어쨌든 아버지는 친엄마의 가게에 들이닥쳐 닥치는 대로 부수고 

친 엄마 남자의 코뼈와 광대 그리고 갈비를 작살내고 내 여동생을 다시 데려왔다 

다시 돌아온 후 여동생은 한동안 내가 알던 여동생이 아니였다 

원래부터 숟기가 많이 없는 아이였는데 

그런일을 겪고 나니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죄책감에서 였을까 여동생에 대한 애착이였을까 

내 여름방학의 대부분의 시간을 여동생 의 마음을 여는대 썼다 

매일 매일 광대 짓을 하고 여동생을 웃기려고 별의 별 짓을 다했다 

3주 정도 지나자 여동생의 상태는 예전만 하진 못하지만 꾀 돌아왔고 

새엄마나 남동생과 함께 식탁에서 식사를 할 정도 까지 호전 되었다 

여름 방학이 끝남과 동시에 동생은 우리학교로 전학 했다 

동생은 여전히 새아빠가 자기를 잡으러 올꺼라며 두려워 했고 나는 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해 

초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 주머니에 작은 면도칼을 가지고 다녔다

지금도 그때 면도칼을 이야기하며 서로 민망하게 웃곤 한다 

다행히 그 후 아무 사건도 잃어 나지 않고 무사히 초등학교를 졸업한 우리둘은 

중학교에 진한하게 되었는데 평준화로 인해 여동생은 동네에 유일한 여중으로 진학하고 

나는 동네에서 꾀나 떨어져있는 공학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걱정은 좀 됬지만 동생의 상태가 2년간 꾀 호전된 상황이였으므로 우리가족은 안심했던거 같다 

중학교 시절 초반에 꾀나 평탄했다 동생도 그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었는지 

나에대한 의존증이 많이 없어졌고 나름의 취미도 생겨 애기 오타쿠로서 자신의 길을 찾은 듯했고 

나또한 2002년 월드컵 열기로 인해 밥쳐먹고 축구하기에 바빳으며 

아버지는 완전 어두운일에서 은퇴해 고깃집에서 소일거리 하며 새어머니와 바쁘게 살았고 

이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고 생각하는 남동생은 혼자 두어도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렇게 2년이 또 지나고 우린 3학년이 되었다.

여동생은 어려서 부터 숟기도 없고 낮도 많이 가리는 소심한 아이였다 

게다가 초등학교 시절 심각한 가정 폭력 후유증 으로 그런 성격은 더 심해졌는데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자 그 성격은 더 심해져 집에와서도 자기방에 쳐박혀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고 말 수도 적어지고 학교를 안가고 혼자 돌아다니다 걸린다던지 

이상한 일이 늘어갔다 새어머니나 아버지 나또한 그저 사춘기가 온거라고 생각하며 

별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그때 눈치를 챗어야 했다 

중학 3학년이 되고 여동생의 그런 행동들이 계속되던 어느날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피시방에서 

게임을 즐기고 있던 나에게 전화가 한 통화 걸려왔다. 

새어머니는 다급하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동생이 병원에 실려 갔다고 했다 

나는 가방도 챙기지 않고 계산도 하지않은체 병원으로 달려갔다 

동생의 부상은 심각한 것은 아니였다 단지 동생이 스스로 자신의 동맥을 끊었다는 사실이 

내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동생은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그 동안 친했던 아이들과 반이 갈리게 되었고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 탓에 반에서 고립된 듯 했다 

원체 소심하고 어렸을적 사건의 보상심리 때문인지 여동생에게 뭐든 최고로 비싼 것 만을 해주던 

아버지 덕에 동생은 꾀나 튀는 존재 였던거 같다 

동생은 머지않아 질이 안좋은 아이들의 타겟이 되었고 처음엔 장난 같던 괴롭힘이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소심한 동생의 성격 덕분에 점점 업그레이드 되 

강도 높은 폭력에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금액의 갈취까지 자행 되었다 

소심한 동생은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새어머니 지갑에서 돈을 훔쳐 아이들에게 바쳤으며 

돈을 가져오지 못한 날은 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새어머니는 자신의 지갑에서 돈이 사라졌을때에 내가 한 짓인줄 알고 남자애들은 그럴때가 있다며 

웃어 넘겼다며 그때 눈치를 챘어야 한다고 술에취하면 눈물을 흘리신다 

솔직히 나도 몇번 훔치긴 했다

동생은 3개월간 자기 혼자만 속을 끓이다 다른 학생들이 모두 하교한 학교 화장실에서 손목을 그었고 

다행히 담배피는 학생들을 잡기위해 순찰을 돌던 학생부 선생님에게 발견되 병원으로 옮겨졌다 

불행중 다행으로 소심하고 심약한 성격 덕에 동생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간단한 봉합수술후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동생의 사건 후 동생은 우리학교로 전학했고 동생을 괴롭혔던 학생들중 주동자 둘은 강제전학 당했고 

콩밥을 먹이겠다던 아버지의 바램과 달리 우리나라의 청소년 법은 가해자에게 유리했다 

동생은 우리학교로 전학하게 된것은 동생의 요구였고 

전학 후 동생의 나에대한 의존증은 더욱 심해졌다 

학교에서 다른 누구랑도 어울리지 않았으며

내가 축구를 하면 골대옆에 앉아 기다렸고 내가 친구들과 피시방에가면 내옆에 앉아 책을 읽고는 했다 

남자의 그룹에 갑자기 여자애 그것도 누구하고도 말을 안하는 어두운 여자애가 끼어들면 귀찮을 법 한데도 

내 친구놈들은 아무런 불평이 없었고 오히려 내동생과 친해지려고 부던한 노력을 하곤 했다 

아직까지도 참 내 친구들이 고맙다 

나와 내친구들의 노력으로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엔 여동생도 가끔 내친구들에게 

웃음을 보이거나 한두만디 말을 건낼 정도로 많이 나아 진 듯 했다. 

내 동생은 나와 내친구들과 함께 낚시를 가거나 놀이동산을 다니며 방학을 보냈고 

내친구들의 배려로 피시방에서 하던 게임을 스타나 카오스에서 동생도 쉽게 배울 수 있는 카트라이더로 바꾸었다.

그렇게 우리의 중학교 생활이 끝났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가 되자 우리는 또 고민에 빠졌다 

평준화로 인문계고는 뺑뺑이였고 동생과 나는 또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동생은 그 사실 만으로도 불안해 했다 

나는 동생을 위해 동생과 함께 갈 수 있는 실업계를 선택했고 

내 친구놈들 중 두놈이 나와 함께 했다 

그중 한놈은 실업계 에 갈 수 밖에 없는 성적 이였고 

한놈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동생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우리학교는 여자상업 고등학교에서 컴퓨터 정보고 로 이름을 바꾸며 남자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그런 학교였다 

양아치들 밖에 없을거라는 걱정과 우려와 달리 우리 셋은 동생을 위해 남자들이 거의 없는 과에 지원했
고 

셋다 지극히 평범한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고교 3년간 거의 왕자 대접을 받으며 학교에 다녔다 .

내 친구놈이 들어가자 마자 커플이 되는 바람에 친구여친의 그룹에 동생을 끼어 넣을 수 있었으며 

그 덕에 동생도 많이 밝아 졌고 나또한 편한 마음으로 충실한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여전히 동생은 나에대한 의존증이 있었지만 천천히 개선 여지가 보이며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죄책감도 많이 사라지던 때였던거 같다 

나는 동생의 선택 덕에 인생 최고의 인기절정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남녀 성비 2대8의 역대급 여초 현상 덕에 주관적으로 아무리 점수를 후하게 주어도 

중상 정도인 나는 수 없이 많은 대쉬를 받았고 1학기 가 지나자 

어떤 여자를 사귈지 골라야 할 처지 였다. 나는 나에게 대쉬하는 4명정도의 여자 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제일 가슴이 큰 1학년위의 누나와 사귀기 시작했다 

연상이여서 그런지 이누나는 스킨쉽이나 애정표현에 거침이 없었고 

사귄지 일주일 만에 전교생이 우리가 사귀는걸 알아야 한다는 듯 

어디서나 애정 표현을 해댔다 사귄지 2주만에 난 남자가 되었고 

부끄럽지도 않은지 그 누나는 그걸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다녔다 

동생에겐 신경도 쓰지못했다 

동생도 겉으론 아무 문제도 없는 듯 행동 했었다 

그리고 그 누나와 백일 기념으로 데이트를 하던 일요일 

다시한번 동생은 자신의 동맥을 끊었다 

또다시 정신없이 달려간 병원 

나쁜짓도 하면 는다고 이번엔 정말 제대로 손목을 깊게 그어서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고 했다 

응급실 밖에서 아버지는 내 멱살을 잡으며 무슨일이냐고 다그쳤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눈꼽만큼도 짚이는 곳이 없었다 

너무나도 답답한 맘에 전화를 받고 달려온 친구에게 담배를 빌려서 내인생에 

처음 담배를 피웠다 

다행히도 동생의 수술은 잘 끝났고 의사선생님은 새어머니의 대처가 정말 적절했다고 했다 

만약 조금만 대처가 늦었어도 위험한 상황이였다고 

새어머니는 동생의 첫번째 자살기도 이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철저히 준비해두고 계셨던거 갔다 

며칠후 동생이 일반병동으로 옮겨졌다 그때까지도 의사는 물론 아버지 새어머니 에게도 

자신이 왜 자살을 기도했는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동생을 만나기위해 학교도 조퇴하고 동생의 병실을 찾았다 

병실에 들어서기전 쌍욕을 퍼붓고 다시는 그런짓 못하게 정신차리게 만들어야 겠다는 다짐과 달리

손목에 붕대를 감고 초췌한 안색의 동생을 보자 왈칵 눈물부터 쏟아졌다 

어렸을 적부터 고질적으로 내제된 죄책감 때문 이였을까 

동생을 부여 잡고 눈물흘리며 내가 한 말은 "미안해 왜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미안해" 였다

서로 부여잡고 10여분을 눈물을 흘리고 동생은 바람이 쐬고 싶다며 

옥상 정원으로 나를 끌고 갔다 

배운지 얼마 되지않은 담배를 태우며 마음을 진정시킨 후 

나는 왜그랬는지 동생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담배 두개피를 더 태울동안 뜸을 들이던 동생은 서글픈 눈으로 어렴풋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동생의 입에서 나온 뜬금없는 사랑한다는 말에 내 대답은 

가벼운 "나도" 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눈치가 없는 건지 순수한 건지 모르겠다 

동생은 내 대답을 듣더니 또다시 서럽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난 영문도 모른채 동생을 달랬다 또다시 몃분간 운 동생은 

훌쩍이며 그간의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여자친구가 생기자 느껴진 상실감과 질투 에 대해 

자신의 마음이 그저 오빠의 대한 집착이 낳은 애같은 질투라고 스스로를 달래던 시간들 

결국엔 자신이 나를 남자로서 사랑한다고 인정하고 느낀 어마어마한 죄책감에 결국 

그런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너무나도 충격적인 이야기에 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동생을 달래긴 커녕 

아무말 없이 동생을 병실에 대려다 주고 한참을 걸었다 

동생의 저런 집착과 감정이 유년기와 중학교 시절 겪은 사건에 기인 하며 

그책임은 온전히 그때 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나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의 상태도 모르고 동생 앞에서 여자와 희희덕 된것을 생각하니 

죄책감에 머리가 터질듯했다 

그날 이후 우리 사이가 예전처럼 돌아가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난 동생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고 동생은 의도적으로 날 피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남매에서 한순간 우린 서로에게 죄인이 되어 있었다 

한동안 방황했다 학교도 갈 수 없었고 집에도 들어가고 싶지않았다 

혼자 있거나 술에 취해 있지않으면 죄책감에 심장이 찢어 지는 듯 숨이 가빠지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나중에 진단 받으니 공황장애 라더라 

그래서 밤새 함께 있어줄 친구들을 찾았고 함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있어줄 

친구들을 찾아 해맸다 

아이러니 하게도 내 방황을 멈추어 준것도 내 동생이였다 

어느날 집에 들어와 보니 내 침대 위에 편지가 놓여있었다 

편지엔 내 방황이 자신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동생의 심정과 

자신의 감정 때문이라면 평생 숨기고 살아보겠다는 동생의 다집이 적혀있었다 

나에게 그 편지는 큰 충격이였다.

내 죄책감 때문에 동생에게 더 큰 죄책감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뒷통수를 얻어 맞은듯한 

충격이였다 그날로 길게 길었던 머리를 자르고 술도 먹지 않고 

학교에 성실히 나갔다 

2년간의 방황이 끝나고 다시금 동생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우리집도 평화를 찾은 듯 했다.

그사이 우리집엔 큰 변화가 두가지 있었는데 

젖살로 통통한 몸매를 유지하던 동생이 젓살이 빠져서 인지 마음고생을 해서 인지 

홀쭉해졌고 항상 최상위권은 아니어도 상위권을 유지하던 내성적이 

개막장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

지금 생각 해보면 동생도 많은 고민끝에 편지를 쓴 것이겠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내 성적과 내신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고3 여름 방학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나는 결국 수험을 포기하고 어차피 제수할꺼 군대문제부터 빨리 해결하겠다는 

생각으로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해병대를 골라 자원입대 하게되었다 

이 선택은 내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이며 해병대에 가고자 하는 미필 친구들이 있다면 

가지말라고 단호하게 말하겠다 해병대에서 남는건 맞은 기억과 때린 기억 예비군 갈때 창피한 

예비군복 그리고 시도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우회 가입하라는 아저씨들의 전화 뿐이다 

내인생에 가장큰 실수 라고 말했다 이말을 명심해야 하는게 난 여동생과 잔놈이다! 

각설 하고 그렇게 난 남들보다 조금 빨리 군대에 갔다

아버지는 자랑스러워 했고 새어머니는 조용히 눈물을 훔쳤으며 

동생과 철없는 막내는 대성통곡을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이던 놈이 갑자기 군인으로 전직해서 잘 할리가 있나 

내 군생활은 처음부터 고난의 연속이였다 

그 힘든 군생활을 버티게 해준 원동력은 주마다 한통씩 오는 동생의 편지였다 

그렇게 지옥같은 3개월여가 흐르고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첫휴가를 나온날 

지독히 추운 겨울날 집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동생을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지만 

겨우겨우 참았냈다 동생은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내게 안겼고 나도 동생을 꼭안아 주었다 

새어머니가 한껏 신경쓴 밥을 잔뜩 먹고 쉬고 있는데 아버지가 나를 부르셧다 

대뜸 배란다에서 담배를 한까치 건내주시는데 몇번 거절하다가 결국 받아 불을 부쳤다 

아버지는 꾀 심란한 얼굴로 나에게 조심 스럽게 말했다 

친어머니가 많이 아픈거 같다고 얼마 못살꺼 같다고 

다음날 아침 짐을챙기고 친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동생의 사건이후 평생을 증오라는 감정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군대에 가서 개고생을 해서 일까 친어머니가 아프다는 이야길 들어서 일까 

그런 내손을 잡고 동생이 따라 나섰다 

내 만류에도 불구 하고 동생은 이미 친어머니를 용서했고 만나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않았다고 하며 나와 함께라면 만날 수 있을꺼라고 했다 

친어머니가 있다는 지방으로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동생은 연신 

장난을 치고 까맣게 그을린 내 피부를 놀리며 애써 밝은책 했지만 

난 동생이 걱정되었다 

지방의 한 요양병원 친어머니가 있다는 병실에 도착하자 내손을 꽉쥐는 손에서 

동생의 긴장감이 전해졌다 난 동생을 진정시키고 어머니가 있다는 병실의 문을 열었다 

병실에 홀로 앉아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였다 

내기억의 어머니는 항상 아름답고 자신감 넘치며 기품있는 모습이였는데 

병실의 어머니는 병때문인지 초라하고 앙상하게 말라있었고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이였다 

동생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자 눈물을 흘렸고 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고 망설이고 있었다 

친어머니도 한눈에 우리를 알아본듯 했다 

그러곤 가장 가까이 있는 물건을 우리에게 던지며 악을써댔다 

여긴 왜 왔냐고 비웃으러 왔냐고 그냥 병원비나 부치지 무슨 구경을 하러 여기 왔냐고 

눈물을 흘리며 아니라며 변명을 하는 동생의 팔을 잡아 끌고 병실을 뛰쳐 나왔다 

그 길로 가장 가까운 술집에 들어가 입대전날에도 마시지 않았던 술을 마셨다 

친어머니의 그 태도 보다 더욱 용서가 안되는건 그런 태도 를 보인 어머니의 모습의

화가 나기 보다 초라하게 늙은 어머니의 모습에 연민을 느끼는 나 자신이였다 

동생 또한 내앞에 버티고 앉아 잘먹지도 못하는 술을 연신 먹어댔다 

우리는 울고 웃으며 친어머니를 저주했다가 용서했다가 동정했다가 다시 저주하며 술을 먹어댔다 

전봇대를 부여잡고 토를 하는 동생의 머리를 잡아주며 등을 토닥여주던 기억을 마지막으로 필름이 끊겼다 

아찔하게 머리가 아파왔고 눈을 떠보니 딱봐도 싸구려로 보이는 모텔 방이였고 

내 곁엔 동생이 누워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와 동생 아래로 깔려 있는 이불위엔 동생의 것이 분명한 혈흔이 

선명히 남아있었고 깨질꺼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머리를 굴리자 어제의 단편적인 기억이 

조금 씩 떠오른다 두사람이 휘청이며 모텔에 들어선것 엉엉우는 동생을 달래며 꼭끼앉았던것 

동생의 키스에 동조해 몸을 맡겼던 것 

모든일이 기억나자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어떻게 하면 동생이 이 일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우리남매의 가장큰 키워드는 죄책감일것이다 

동생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새아버지의 모든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며 죄책감을 강요 받았고 

나는 그런 동생을 지키지 못해 죄책감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저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고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했던 동생이 이일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덜컥 겁부터 났다 

주섬주섬 속옷을 주서입고 불편한 화장용 의자에 앉아 줄담배를 태우다보니 

어느샌가 동생이 깨어났다 동생은 급히 이불을 감아 자신의 몸을 가리며 아무말도 없이 

나를 쳐다 보았다 지금에서도 내가 그때 어떤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동생은 멍한 눈으로 나를 뻔히 바라보다가 이내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다 

나도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반 나체 상태인 것도 신경쓰지 않고 우린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끓어 안고 

눈물을 쏟아냈다 연신 서로 에게 미안 하다고 말하며 

그렇게 한참을 눈물을 쏟아낸 후 우린 다시 한참을 혀를 섞고 또 다시 하나가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안타깝께도 설명할 수 없다 

우리 남매는 서로에게 너무나도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고 서로를 너무 사랑했기때문에 

그렇게 되었으리라 나또한 짐작 할 뿐이다 

우린 그렇게 죄책감에 의해 천륜을 어긴 괴물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난 내내 동생의 책임이 아니며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닌 

우리의 운명 같은 거라고 설득했다 

부대에 복귀 하면서도 새어머니나 아버지에게 동생을 잘 부탁한다며 신신당부 했다 

다행히도 내가 걱정하던 일은 벌어 지지 않았고 

한번 그런일을 겪고 나자 동생과 나의 관계는 그것이 자연스런운 일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인과 남매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했다 

전역 후 기적의 재수에 성공한 나는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으며 이제 졸업을 앞 두고 있다 

동생 또한 나보다 한발 먼저 사회에나가 나름대로 자기가 원하던 분야에서 자신의 꿈을 키워 가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눈물을 흘리며 몸을섞는다 

우리는 괴물이다 우리는 우리가 괴물이라고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린 누구보다 서로 사랑하고 있는 괴물이다.

변명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글이 길어졌습니다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 였습니다 

다시는 우리 같은 괴물이 태어나지 않길 빌며 이글을 마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